웰메이드 음악의 대표 주자, 듀오 노리플라이no reply의 멤버 정욱재(a.k.a TUNE)의 스페인 여행 이야기 네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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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남자의 본격 스페인 트레킹 여행기

Day 5

결국 오후가 한참 지나서야 몬세라트행 기차에 올랐다.
바르셀로나에서 몬세라트로 가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는데, 나는 기차와 산악열차의 조합을 선택했다. 에스파냐 광장Pl. Espanya에서 몬세라트로 가는 기차를 타고 몬세라트 산 아래 작은 마을이 있는 Monistrol de montserrat에서 내린다. 그리고 몬세라트 수도원으로 올라가는 산악열차로 갈아타는 방법이다.

바르셀로나 도심을 빠져나오자 한적한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1시간가량을 달리면 저 멀리 거대한 바위산이 나타난다. 몬세라트Muntanya Montserrat다. 금방이라도 간달프 형이 은빛 수염을 휘날리며 뛰어내려올 것처럼 이국적이고 웅장한 위엄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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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istrol de montserrat에 내려 절벽 위 수도원까지 오르는 산악열차로 갈아탄다. 기차는 깎아지는 절벽들 사이로 덜컹덜컹 힘차게 오른다. 어느덧 창밖으로 보이는 산 아래 마을의 집들은 손톱만큼 작아졌다. 마침 석양이 지고 있어서 세상이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다. 기차 안의 모두가 감탄하며 사진 찍기에 바쁘고, 나 역시 넋을 잃고 창밖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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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세라트 수도원 Santa Maria de Montserrat Abbey

몬세라트 산 위에는 11세기에 세워진 수도원이 하나 있다. 바로 이 수도원을 방문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는다. 기암절벽을 등지고 자리 잡은 이 오래된 수도원에는 꽤 큰 규모의 박물관과 관광객을 위한 레스토랑, 호텔 등의 시설들이 있다. 평소 같으면 박물관을 먼저 찾았겠지만 이미 어둑해지고 있기에 성당을 잠시 둘러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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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안의 고요한 침묵을 맞이하자 짜릿할 정도의 엄숙함을 느낀다. 오랜 세월 동안 이곳을 다녀간 수많은 순례자들 역시 같은 경험을 했으리라. 수행을 위해 고단한 여정을 떠났을 그들을 잠시나마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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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네레오와 아킬레오’라는 매우 간지 나는 세례명을 가지고 있는 가톨릭 신자다. 따라서 모두의 평화와 안녕을 기도하며 거금 2유로를 들여 촛불을 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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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서 나오니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미리 확인해둔 야영장으로 향한다. 몬세라트 수도원 근처에 야영장이 있어서 무척 반가웠다. 출발 전에 마트에서 구입한 아시아 스타일의 라면을 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군침이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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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세라트는 무수히 많은 암벽으로 이루어졌기에 세계 클라이머들이 열광하는 장소로 근처에 사설 캠핑장이 있다.
 
텐트를 치고 저녁 먹을 준비를 하는데, 맙소사… 나름 캠핑왕인 나도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할 정도로 엉망진창인 일이 벌어지고야 만다. 출발 전, 그렇게나 헤매고 겨우 구매한 캠핑용 가스가 무려 내 버너와 규격이 다르다… 5시간 전, 한없이 위대해보였던 아웃도어 스토어의 이미지가 순식간에 무너진다.

숨을 깊게 고르고 천천히 생각한다. ‘그래. 거기에는 가스 종류가 따로 없었지. 그래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캠핑용 가스와 버너에 규격이 따로 있다는 건 생전 듣도 보도 못 했으니 나에겐 죄가 없다.’

결국 첫 해외 야영부터 매우 값진 경험을 하게 된다. 혹시라도 이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현지에서 가스를 구매할 땐 꼭 주의하기를 바란다.

쏟아지는 눈물을 머금고 보드카를 벌컥벌컥 마시면서 분노의 빵 쪼가리를 씹는다. 혹시나 불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을 대비해, 말라비틀어진 빵과 서해의 염전을 모두 담은 것처럼 짜디짠 하몽을 사왔기에 망정이지… 하지만 앞으로 이틀간 이걸로 연명해야 한다는 사실에 상당히 우울해 져서 그만 텐트를 박차고 나온다.

하늘 위로 구멍이 뚫렸는지 별들이 쏟아진다. 밝게 빛나는 달과 별을 랜턴 삼아 야영장 주위를 오르기로 한다. 7시쯤이니까 사실 초저녁이지만, 도시를 벗어나면 세련된 문명인이 즐길거리는 사실 그다지 없다. 휘파람을 불거나 요즘 쓰고 있는 노래의 가사를 요리조리 지어보면 흥얼거린다. 언덕에 서서 저 멀리 오늘 하루도 뜨거웠던 태양의 잔상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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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6

다시 아침이 찾아온다. 산 능선 아래 마을도 기지개를 펴며 잠에서 깬다.
야영을 하면, 햇빛에 눈이 부셔서 이른 시간에 자동 기상을 하게 된다. 동시에 간밤에 얼어붙었던 몸이 사르르 녹는 짜릿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사실 한국의 혹독한 추위에 비해 스페인의 겨울은 매우 따뜻하다. 혹시 모를 한파를 대비해서 챙겨온 영하 25도까지 견디는 동계용 침낭이 야속할 정도로 무겁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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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는 몬세라트 트레킹을 마음껏 즐기자. 사실 이번 여행의 시작은 1편에서도 소개했던 것처럼 산티아고 순례길이였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순례길만 걸을 수 없었기에 일부 구간만 살짝 맛보기로 한다.

이곳에서 ‘카미노’라 불리는 순례길은 상당히 많은 코스가 있는데, 마침 몬세라트에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순례길이 있다. 스페인 동쪽 끝 지중해에서 시작해 몬세라트-사라고사Zaragoza-브루고스Brugos 등의 도시로, 스페인의 동서를 가르는 루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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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www.santiago-compostela.net

산티아고의 길.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사람이고, 스페인의 수호성인인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로 향하는 길이다. 중세부터 내려온 길로 다양한 경로가 있으나 가장 인기 있는 길은 ‘카미노데프란세스’다. 프랑스 남부의 생장피드포르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산티아고데콤포스델라까지 이어지는 800킬로미터의 길이다. 가톨릭 성지순례길이었으나 현재는 전 세계에서 도보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완주하는 데 걸리는 기간은 보통 한 달이다. – 김남희, “세계의 걷고 싶은 길”, 네이버캐스트
 
몬세라트부터 리이다Lerida를 향해 이틀 동안 걸을 수 있는 만큼 무작정 가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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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현지인들의 말처럼 비수기라서 그런지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다. 깎아진 절벽을 따라서 천천히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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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어귀 벤치에 앉아 매우 늦은 점심을 (역시 말라비틀어진 빵 조각에 하몽을 얹어서) 먹으며 다음 루트를 검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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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의 순례길은 대부분 작은 시골 숲길이라, 길을 알려주는 조가비 문양을 잃어버리면 답이 없다. 대중적인 코스는 다른 이들을 따라 함께 걸으면 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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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www.naturaltrekking.com
 
그리고 이 지역만의 다양한 트레킹 루트는 더욱 더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순례길을 두 번이나 격파한 친구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이거 카미노 표지판 아니지?!”
“그냥 발 가는대로 가! 검색해 보니 그 길도 좋아 보이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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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을 고집하는 걸 포기하고, 몸속 깊숙이 잠들어 있던 짐승의 감각을 100% 끌어올려 서쪽으로 걸어간다.

몬세라트에서 인생 사진을 마구 찍다 시간을 허비했다. 얼마 가지도 못했는데 해는 벌써 저물어간다. 대략 오늘 하루 30km를 걸었다. 조금만 더 가면 Igualada라는 제법 큰 도시가 나오지만, 도시로 들어가면 야영을 할 수 없으니 외곽에서 야영을 하기로 한다. 그렇게 야행성 짐승의 눈으로 모드를 변경하고 야영지를 물색하며 걷는 중, 예상치 못한 아주 작은 마을이 나왔다. Castelloli라는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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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당이 떨어져서 콜라가 당기는 타이밍인지라 쾌재를 부르며 불이 켜진 마을 펍에 들어간다. 자그마한 펍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모두 모여계실 법한 흥으로 가득 차있다. 이곳 어르신들은 장기나 바둑 대신 체스와 카드를, 막걸리가 대신 맥주를 드신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전문산악인 포스로 문을 박차로 들어가니 다들 이 낯선 동양인 꼬마가 자신들의 영역에 불쑥 찾아온 것을 의아해 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곧 “오! 몬세라트 다녀왔니?”라며 환영한다.

크루즈 캄포Cruz campo(스페인의 맥주 브랜드)를 두병 연속 들이키고, 이 펍에서 가장 젊어 보이는 (하지만 우리 아버지뻘은 되어 보이는) 손님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혹시 근처에 야영할 만한 장소가 있는지 묻기 위해서다.

바르셀로나 같은 대도시에서는 대체적으로 영어로 소통이 가능하지만, 관광지를 벗어나면 상황은 다르다. 다행히 어느 정도 영어를 할 수 있는 분이었지만, 캠핑장과 호텔은 Iguarada까지 가야만 있다는 절망적인 정보를 알려준다. “Iguarada까진 대략 15km정도라서 차로 30분쯤 걸리는데, 여기는 버스도 택시도 없어.”

이미 9시가 다 됐는데, 2시간을 더 걷고 넝마가 된 상태로 캠핑장에 가느니 차라리 이 마을 언저리 벌판에 텐트를 치는 게 나을 것 같아, 크루즈 캄포를 한 병 더 외친다. 잠시 후 아까 이야기를 나눈 분이 다시 다가와 “내가 태워다 줄까? 나 그쪽으로 가는데.”라며 엄청난 호의를 베푼다. “고마워요!”

짐을 챙기고 있는데, 또 한 번 말을 건다. “아니면 그냥 이 마을에서 잘래? 우리 마을에 호텔은 없지만 공짜로 잘 수 있는 곳이 있거든! 따라와 보면 알아. 바로 이 건물 앞이야.”

사실 생전 처음 온 낯선 땅에서 낯선 이를 경계해야 하는 것이 맞겠지만, 이 펍의 분위기를 보니 전라남도 해남 어느 땅끝 마을에서 통통배를 타고 이를 모를 섬에 들어가 넉살 좋은 동네 어르신을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라 금세 경계를 풀어버렸다. 그렇게 그를 따라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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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모든 의혹이 사라진다. 한국으로 치자면 마을회관 같은 곳이다. 간혹 마을 행사 때문에 외부인이 찾아오는 것을 대비해 임시 숙소로도 사용한다며, 늘어선 2층 침대를 보여준다.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무엇보다 시선을 사로잡은 건 사용해도 된다는 훌륭한 부엌이다.
“라면을 먹을 수 있다!! 내 몸에 뜨거운 MSG를 투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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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난로도 켜주고 인덕터 사용 방법과 주방 요리 도구가 어디 있는지 알려준다. 내가 돈이 없다면 돈도 빌려줄 기세로 “잘 자! 열쇠는 떠날 때 아까 그 펍에 돌려주면 돼!”라며, 석양을 등진 간달프처럼 사라진다. 국내외를 떠나서 시골 인심이란 히트텍 이상으로 따뜻한가보다. 예상치 못한 환대를 받은 난 미소를 머금은 채로 폭풍 라면 흡입 후 잠자리에 든다. 엘비스형이 외로운 나를 지켜준다.

 
엄청난 호의를 베풀어준 Roger Casanovas는 알고 보니 카탈루냐 지방의 성인가요 신에서 활약하는 가수인 것이다. 나도 한국을 “대표”하는 뮤지션이라 소개한다. 그리고 아시아 무비스타 한효주와 함께한 ‘Don’t You Know’ 영상을 보여준다. 그는 한효주가 무척 아름답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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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Castelloli를 지나치는 일이 생긴다면 마을 회관 앞에서 Roger~!!를 외치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된다.
 

Day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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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인심만큼이나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한다. 저녁에 도착해서 잘 몰랐는데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멋이 있는 동네다.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식당에는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하는 어르신들로 북적인다. 나도 자리를 잡고 스페인 스타일의 거대한 샌드위치를 먹는다. 어르신들이 간밤에 잘 잤냐며 인사를 건네신다. 이미 마을에는 무지막지한 배낭을 메고 찾아온 동양인 꼬마의 소식이 퍼졌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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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www.postcity.com / www.davidlebovitz.com
 
이 몽둥이만한 바게트 사이로 절인 하몽과 야채를 마구 구겨 넣어 나오는 샌드위치는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매력적인 맛을 지녔다. 급기야 나는 하몽에 중독되어 버렸고 남은 여행기간 동안 매일 하몽을 과자처럼 봉지 째 들고 다니며 먹기에 이른다.

아침도 든든히 먹었겠다, 다시 힘차게 걸어가 본다. 오늘은 해가 떨어지기 전에 렌페Renfe (스페인의 열차 이름)가 닿는 곳으로 무조건 가야한다. 내일 세비아행 기차를 탈 계획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단은 힘닿는 대로 걷다가 어두워질 무렵에는 버스를 타든 히치하이킹을 하든 대도시엔 들어가야 한다.

지도를 보니 대충 30km 정도 걸으면 La panadella라는 버스가 있을 것 같은 도시가 있다.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세비아행 렌페가 있는 Lleida 혹은 Zaragoza까지 이동하는 것으로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하고 마구 걷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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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면서 마주했던 수많은 풍경이 아른거린다. 걸음에 맞춰 흥얼흥얼 멜로디를 읊조리며, 작업 중인 곡들의 가사를 써내려간다. 그 동안 내가 작사, 작곡에 참여한 노리플라이와 TUNE 노래의 가사 대부분은 이렇게 만들어 졌다. 차곡차곡 쌓인 내 작품만큼 산을 오르고 해변을 거닐고 자전거 페달을 밟아왔다.

난 이 삶이 무척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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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트페이퍼 / 글, 사진_정욱재 편집_진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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