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메이드 음악의 대표 주자, 듀오 노리플라이no reply의 멤버 정욱재(a.k.a TUNE)의 스페인 여행 이야기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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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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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2

말라가Malaga

산행을 마치고 론다Ronda로 돌아왔다. 말라가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다. 바로 그라나다로 갈까도 했지만 바다가 보고 싶었다. 바르셀로나에서 그랬던 것처럼 따듯한 해변에 앉아 볕을 쬐고 싶다. “스페인 남부 여행은 렌터카와 함께!”라는 친구의 조언처럼 바다를 따라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매우 아름답다. 급하게 떠나는 바람에 국제면허증을 발급받지 못한 것이 거듭 후회된다. 차선책으로 스쿠터라도 빌려볼까 했지만, 역시 국제면허증이 필요해서 눈물을 머금고 포기! 다음번 스페인 남부 여행은 꼭 렌터카 혹은 오토바이로 하겠다는 의지와 함께 말라가에 도착한다.

땅거미가 질 무렵 숙소에 짐을 두고 어슬렁거릴 요량으로 밖으로 나왔다. 마침 근처에 말라가 현대미술관Centre for Contemporary Art in Malaga가 있다. 비교적 늦은 저녁까지 전시가 진행되고 입장료도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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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www.andalucia.com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말라가와 세계의 신선한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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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미술관들은 대부분 No Flash 모드에 한해 사진 촬영이 허용된다.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비교적 현대적인 분위기의 가게들과 조형물들이 이곳이 휴양지임을 알린다. 요트선박장의 수많은 요트들이 달빛을 받으며 뒤뚱뒤뚱 거린다. 나도 와인을 홀짝거리며 달빛을 따라 백사장을 거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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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막바지, 데이터도 거의 다 써서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스마트폰에 저장된 음악을 랜덤으로 틀어놓았다. 자리를 잡고 앉는데, 마침 김동률 선배님의 ‘귀향’이 흐른다.

선배님의 무수히 많은 작품들 중에 ‘동반자’라는 곡을 가장 좋아했다. 몰랐는데 그 곡만큼이나 이곡도 좋았다. 가끔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앨범의 후미진 트랙에 위치한 곡들에서 아티스트 삶의 정수를 담은 명곡들이 있기 마련이다. ‘귀향’이라는 곡을 무한반복하며 누추하지만 서른이 훌쩍 넘은 이 마당에 눈물을 흘려본다. 거친 남자처럼 보여도 어릴적부터 난 눈물이 많았다. 이렇게 해변에 앉아서 남몰래 놓지 못한 끈을 떠올릴 때면 으레 눈물을 쏟기 마련이다.

달빛이 뚝뚝 떨어지는 수평선 위로는 철새들이 UFO처럼 무리지어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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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3

그라나다Granada

어제 호스텔에서 만난 친구도 마침 오늘 그라나다로 떠난다고 한다. 암스테르담에서의 교환 학생 시작 전 배낭여행을 하고 있는 친구다. 함께 호스텔 사장님께서 추천해 주신 말라가의 오래된 재래시장에 서서 해산물들로 이루어진 타파스와 맥주를 빠르게 흡입하고 버스터미널로 이동한다. 카페에서 버스시간을 기다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서로의 음악 취향을 물었다.

“혹시 음악 좋아해? 한국뮤지션 누구 즐겨 들어?”
“데이브레이크, 노리플라이 등 해피로봇 레코드의 음악을 좋아해요. 형은요?”
“아아 그렇구나. 난 잘 몰라. 하하하…”

속으로 혼자 낄낄 거리다가 잠시 후 내가 그 중 한 팀에 몸담고 있다고 말해줬다. 눈이 동그래진 그 청년은 알아보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했지만,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다며 넉살좋게 웃어줬다.

자유롭게 살고 싶은 난 지금이 좋다. 가끔 대중에게 얼굴이 잘 알려진 지인들을 볼 때면 안타까움을 느낀다.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들로부터 일상이 바스라지는 것을 견뎌낼 정도의 대인배가 아니다. 나는.

덕분에 더욱 가까워진 우리는 그라나다에 머무는 며칠 동안 콤비를 이루어 펍들을 격파하기로 다짐했다. 삼국지 도원결의처럼 말이다.

그라나다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전망대로 향한다. 평소 같으면 좁디좁은 골목에 무서운 집시 형들의 음악과 호객으로 북적였겠지만, 비 때문인지 쥐죽은 듯 고요하다. 전망대 너머로 내일 방문하게 될 그라나다의 자랑, 알함브라 궁전의 담벼락이 로맨틱한 조명을 받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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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정도 스페인 여행을 다니면서 이곳저곳에서 알게 된 친구들이 생겼다. 가끔 다시 만나게 될 때면 십년지기만큼이나 반가운 마음이 든다. 방학을 맞아 교편을 잠시 내려둔 선생님, 요 근래 히트를 친 게임의 개발자, 말라가부터 함께 이곳에 오게 된 교환학생 청년. 이렇게 며칠 간격으로 알게 된 대한의 건아(녀)들은 그라나다의 모든 맥주를 소비할 기세로 펍들을 하나씩 격파한다. 급기야 “클럽으로 가자!”는 모두의 아우성을 뿌리치고, 원로인 나는 터벅터벅 숙소의 침대로 골인에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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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4

간밤의 비 때문인지 싸늘하고 바람이 마구 부는 그런 날이다. 그래도 소년 곱단이가 클래식 기타 교본 속 콩나물로나마 마주했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궂은 날씨지만 인류가 낳은 이 위대한 건축물을 느끼고자 하는 입장객들로 입구는 북적였다. 한국 아저씨들의 교복인 북쪽 얼굴 방수자켓을 입고, 조용히 줄을 섰다. 그 순간 저 멀리 한국인으로 보이는 미녀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걸어온다.

“제가 아는 분이랑 무척 닮으셨네요.” 반가운 한국말로 내게 말을 건다.
나는 곧 재빠르게 근엄하고 ‘우아한’ 표정으로 화답한다.
“그분이 혹시 노리플라이의 정욱재인가요.”
“네 맞아요.”

초롱초롱한 그녀의 눈빛과는 다르게 옆에 있던 그녀의 일행은 이 상황을 연안부두 횟집의 개불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우리의 대화를 관찰한다.

그렇게 우리 셋은 머리카락이 뽑힐 정도의 세찬 바람을 맞으며 중동과 유럽이 낳은 최고의 건축물을 감상한다. 무수히 많은 음악과 문학작품이 이곳을 찬양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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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이 점진적으로 시려오는 삼십대에게 궁전의 계단은 방대하고 가파르다. 오랜 시간 묵혀둔 숙제를 끝낸 후, 넝마가 된 자아를 위로하고자 우린 그럴싸한 식당으로 향했다. 남은 유로화를 모두 소비할 작정으로 음식을 주문하고 와인을 시킨다. 이제 이 여행도 막바지다.

박사 논문만을 남겨두고 여행을 온 친구들은 저마다 삶의 고단함을 쏟아내기에 바쁘다. 문득, ‘평소 즐겨듣던 음악을 만든 뮤지션에게 연애의 실패와 환희, 그리고 삶의 여정을 이야기 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라는 생각이 스친다. 나 또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경험해 보지 않은 삶을 대충이나마 짐작해 본다.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는 이런 자리가 매우 흥미롭다. 나와는 다른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새로운 영감도 얻고 삶에 대한 다양한 태도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내 주위에는 뮤지션 친구들만큼이나 다양한 직업을 가진 친구들이 많다.

음식과 와인으로 배가 두둑해진 후, 여행이 끝나면 한국에서 또 보자는 완벽한 인사와 함께 각자의 숙소로 향한다.

1인실의 좁은 호텔은 불과 하루 사이에 나만의 아늑한 공간이 됐다. 침대에 누워 끝이 보이는 나의 첫 스페인 여행을 위로한다.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의 버킷리스트들이 차례차례 지워지고 이제는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만 남았다.
 
 

Day 15 & 16

마드리드Madrid

마드리드 기차역에 도착했다. 언제나 그랬듯 마트에 가서 하몽을 마구 구매하는 것으로 새로운 도시의 시작을 알린다. 이제 이틀 뒤면 나는 스페인을 떠난다. 동시에 이스탄불 스톱오버의 설렘이 스물스물 나를 잠식한다.

밤늦게 도착한 마드리드는 가까스로 부여잡고 있는 나름의 전통 뒤로 각박한 도시의 풍경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메가시티가 그렇듯 큰 도로와 빠른 걸음의 차들이 나를 스친다. 언제부터인지 도시보다는 낡고 오래되고 여유와 인심이 있는 곳이 좋아졌다. 말끔한 인도 위에 서 있는 것 보다 흙을 밟고 서 있는 것이 좋다. 호텔보단 작은 내 텐트가 더 아늑하고 포근하다. 그런 의미에서 문득 다이나믹 듀오 형들의 노래가 떠오른다.
 

 
여행 시작 첫날, 바르셀로나에서 피카소의 시녀들Las Meninas을 봤다. 그리고 여행의 마지막 날에는 원작인 벨라스케즈Diego Velasquez 그림 앞에 서게 되었다. 무작정 비행기부터 탔던 여행치고는 처음과 끝이 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무지막지한 배낭을 메고 떠나온 스페인 여행이 이렇게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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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ww.wikipedia.org
 
이스탄불로 향하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이번 여행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빽빽한 메모로 가득 찬 수첩과 휴대폰 녹음기처럼 나 역시도 새로운 무엇들로 채워졌다.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문화를 경험해 보는 건 음악을 만드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새로운 곳을 경험하는 건, 어린 시절 죽마고우가 건네주었던 라디오헤드의 음반만큼이나 내게 파격적인 문화 충격을 선사한다.

고맙게도 매일 아침 직장으로 향하는 삶이 아니기에 난 언제든 떠날 수 있다. 통장잔고만 허락한다면 어디든 가능하다. 가끔 사람들이 이런 삶을 부러워 할 때면 닭이 알을 낳듯 새로운 창작물을 토해내야 하는 고통 뒤로 이런 혜택이 주어졌다고 말하곤 한다.

어느 순간부터 여행을 통해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계획하는 것이 익숙해 졌다. 여행은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복잡한 일상을 떠나 자신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마주할 수 있게 해준다. 위험한 폭탄을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해체시키듯 인생의 큰 짐들을 먼 이국땅에 내려놓고자 한다. 물론 안타깝게도 늘 가져온 짐만큼이나 또 다른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돌아가기를 반복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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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그리웠던 대문을 열고 나를 반기는 꽃님이를 안는다. 그리고 간절히 원했던 엄마 밥을 한술 뜨며, “다음엔 어디 가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웃음이 난다.

방랑자가 꽤 많았던 외가 쪽의 뜨거운 피는 나에게 엉덩이를 붙이고 사는 직업을 포기하게 했나 보다. 하지만 나에게는 노리플라이 3집이라는 어마어마한 과제가 남아있다.

따라서… 당분간은 그동안 가보지 못한 국내의 구석구석을 자전거나 도보로 여행을 할까 한다. 하하하.

(사실 스페인 여행기를 연재하는 동안도 섬진강변을 따라 남원부터 여수까지, 그리고 고흥으로 떠난 자전거 여행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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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의 첫 번째 스페인 여행기를 마칠까 한다. 이스탄불에서의 이야기가 궁금한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스탄불 이야기는 정중히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글쓰기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이번 여행기를 통해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스탄불 사진을 몇장 남기며,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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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스페인 여행기와 함께 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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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트페이퍼 / 글, 사진_정욱재 편집_진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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